2006년 07월 06일
17세도 아니면서.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아무 일도 없는데 기분이 우울한 날이 있다. 그 날 나는 아무 일도 없는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막연한(?) 불안과 그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꼬박 새우고(…사실 그 전 날 너무 많이 자서 잠이 안 왔던 탓도 있긴 하다.)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나와버렸다. 언제나 아침에 나가기 때문에 특별할 것까진 없다곤 하겠지만, 그렇게 학교에 가지 않고 하루 종일 거리를 돌아다녔다. 무심코 버스를 보았는데 소래포구에 간다고 써 있길래,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소래포구라도, 연안부두라도. 그냥 3500원 내고 을왕리 해수욕장에 가도…… 그냥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처 몰랐는데, 영화를 보면서 졸기까지 하고(야한 장면이었는데!) 다 보고 나오니 상당히 몸이 찌뿌둥해서 피곤하구나 하다가 더 우울해졌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2시간 동안 쇼핑몰을 돌아다니다가, 핸드폰의 전화번호부를 살펴보다가는 그냥 이 상태가 나을 듯 싶어 그만두었다. 그렇게 겨우 토닥이며 일어서고, 떡볶이를 먹고, 인천의 주교좌 성당인 답동 성당에 가서 영어 미사라는 새로운 체험을 해 보았다. 어렸을 때 상 받으러 갔었는데. 성체 모시는 방법도, 손을 쥐는 방법도 외국인들과 나는 달라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Amen의 발음이 '에이먼'이라 신기해했다. 강론 때 painful…이란 단어가 나온 것 같았는데 그냥 혼자 그 마음과의 일치를 기뻐했다. 아버지가 어릴 땐 라틴어로 미사를 했다고 했는데, 영어라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영어(…아니 라틴어였던가)로 부르던 성가가 아는 노래여서 왠지 벅차올랐다. 그렇게 미사를 끝내고 나왔는데 전화가 와 있어서 통화를 했다. 거기서 나는 나의 여행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기분을 끌어올렸는데, 그냥 이 상태로 잠들고 일어난다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친분 없는 누군가를 만나야 했다. 아니, 친분이 있었던가. 앞에선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는 누군가를. 그냥 이끌려가듯이 나갔고, 나는 지친 그 감정을 숨기지 못했고 그 분들도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망할, 어린애냐.
 서론이 길었지만 아무튼, 자기 감정과는 상관 없이 웃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있다. 자의든, 타의든. 나는 그게 안 된다. (그렇다고 내가 입 다물고 있을 때는 기분 나쁠 때라는 건 절대 아니다.) 그것이, 그냥 안심할 수 있는, 허용될 수 있는 누군가 앞에서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 친분은 없어도 허용될 수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그런 것 같다. 아직까지는.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다면 상당히 골치아픈 문제다. 힘들겠지만. 나는 어린 취급을 받는 걸 싫어하면서도 어린애로 있으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건 기억이 안 나지만 고 3 때 땍땍거리듯이 담임 선생님께 대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선생님도 내가 매우 안 좋은 상태라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건 알고 있었겠지만 역시 버릇없게 보였겠지. 버릇없는 거 싫은데, 알고 있으면서도, 머리론 이해해도. 중, 고등학교 땐 친구들을 너무 힘들게 해서, 지금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감정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 날 친구를 부르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하긴, 말을 해도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면 소용이 없겠지. 그래, 17세도 아니면서 말이다. 자꾸 삶이 자기 합리화되어 가는 것 같다.
by 미르시내 | 2006/07/06 13:26 | 상념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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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시온 at 2006/07/06 22:22
16살땐 세상 모든 즐거움이 제게 있는것 같았고 17살땐 가시 잔뜩세운 고슴도치마냥 날카롭게 삐죽대던 모습이 있었습니다.뒤돌아 서면....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벌게질정도지만 그때가 없었으면 좋았을까?란말을 하면 절대 그렇지는 않은게 그때만큼 제 감정을 솔직하게(사실 화풀이지만;)드러낸적도 없어서요.학원수업이 끝나고 19시 캐러비안 보려고 갔었으나 지갑=카드를 놓고와서 그냥 버스타고 돌아왔다던 슬픈 이야기(...)
Commented by 비오네 at 2006/07/07 12:45
저도 종종 가면을 쓰지만 은연중에 싫은 사람에게는 본심이 나가더라고요.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한다는 게 나중에 스트레스로 돌아오기도 하고..
전화로 욕을 잔뜩 먹은 적이 있는데 (군대에서요.. 아마 인생에서 먹을 욕의 절반쯤은 먹은듯.. ;;)
내가 뭘 잘못한 건지는 이미 잊어버렸고 아직 인격도야가 부족한 건지 도저히 평정유지가 안되더군요.
그래도 일단은 주로 웃고 지냅니다. 그저 그런 기분일때도요. 웃다보면 웃을 일이 생기지요. ㅡㅡ;
Commented at 2006/07/07 13:0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6/07/07 19:44
/시온님/
저도 16살- 아니군요, 생일이 빠르니까; 15살 때가 가장 좋았어요.
생각해 보면 저의 17살은... 아무런 추억이 없네요. 아하하.
아아아, 정말 부끄러운 기억은 떠올리기도 무서워요. ^^;
사실 뭐 지금은 솔직하게 감정 드러내기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어렸을(?) 땐 그냥 막 제멋대로였던; 기억이 있지만;;; 아이 부끄러워.
그래도 그렇게 겪으면서 자라는 거겠죠? 웃음으로 쓰다듬을 수 있을 기억.
캐리비안 베이~가 아니라 해적! 저도 볼 예정이에요!!! +_+
극장까지 가셨다가 돌아오셨다니 남 일 같지 않은걸요;

/비오네님/
아닙니다. 비오네님은 가면이 아니라 모자를 쓰십니다.
농담이고요; 헤에~ 싫은 사람에게 본심이 나가는... 것일 수도 있군요.
그건 또 생각해 볼 문제네요. 오히려 그런 게 맞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헉, 전화로... 이야기하기도 힘드셨겠어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그냥 상상하기만 하면 모르겠는데 직접 그런 감정에 닿게 되면
정말로; 마음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나아지려나...
뭐, 웃고 지내야죠~ 사람은 웃는 모습이 가장 예뻐요.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6/07/07 19:44
/비공개님/
격려 감사합니다. ^^ 지금은 괜찮아요~ 으랏차차 롤로로로로~
차라리 이유를 안다면 좀 편할 수도... 있을까요? 그 반대일지도;
어렸을(?) 땐 겉으론 밝은 사람은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역시 그건 아니겠지요. 자기 기준에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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