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4월 23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열흘 좀 더 전인가……. 버스를 탔는데 동창을 만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였을지도 모르는 사이. 그 날따라 학교에서 일찍 나와 버스를 타서 창에 머리를 기대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제물포에서 친구들과 함께 타더라. 특별히 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눈에 확 들어왔다. 고등학교 내내 길지는 않았던 그녀의 머리는 샛노란 염색을 한 채 허리까지 올 정도로 길어 있었고, 뭐, 여전히 행복한 모습이었던 듯 하다. 보이고 싶지 않아서, 보고 싶지 않아서, 듣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고, '이나바씨, 더 크게 노래해 주세요.'라고 마음 속으로 가만히 속삭였다. 20분쯤 지나서 그녀는 역시 내가 내리는 곳 한 정거장 전에 내렸고 한 정거장 다음에 나도 내렸다.
 특별한 애정은 없다. 이미 그 때쯤, 난 사람들과의 관계에 질려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친구를 버렸고 나도 친구를 버렸다. 그녀는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는 1학년 학기 말에 선심쓰듯 그 친구에게 형식적인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는 후덕함을 발휘했고, 나는 카드를 줄 타이밍을 놓친 채 버림당했다. 그리고 곧 학년이 바뀌면서 나 또한 그녀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친구가 많았으니까 말이지, 별볼일 없는 친구 따위는 마구 내버려도 좋은 거였니? 특별히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뭐 많이 겪어봤으니 말이지. 최후의 도피처로 나를, 내 친구들을 선택했던 그들이 학년이 바뀌면서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잊어버렸다. 누구는 잔인한 모습으로 내게 돌아오기도 했다. 스쳐간 사람들 모두에게 특별한 인연을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던 걸까. 붙잡아 둘 만큼의 애정이 없었던 걸까. 그래, 그 잊을 수 없는, 그 인간은, 내 옆의 아이에게 들러붙었었지. 함께 있었던 나는 관심사가 아니었어. 그래, 마치 빼앗아가려는 듯이. 처음부터 자기가 친구였다는 듯이. 내가 그 사이에 끼어든 존재였다는 듯이. 그러나 학년이 바뀌고 난 후에 그들은, 별 특별한 존재가 아닌 상태로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기에도, 무엇이었을까. 버린 사람은 누구였을까. 설마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나의 옛 친구가, 버렸을 리는 없었겠지. 나의 감정 따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너에겐 이해되지 않을 감정이었겠지……. 그래서 그대로 안녕이었던 거였겠지. 우리는 어색함에 서툴렀던 걸까. 사실 이런 식으로라도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그 애였는데. 차라리 가슴이 아파도 학교 안에서 늘 마주치던 그 때가 나을 뻔했다. 가까운 데 사는데. 이사갔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언제나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떠나버려.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내게는 일방적인 감정을 쏟아부을 상대가 없다. 그건 지쳤어. 언젠가 누군가와 공감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대화가 잘 통해서 웃고 떠들며 즐겁게 얘기해도, 친구란 느낌이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반면 별 말이 없어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고. 특별히 그런 걸 신경쓰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느끼면서 사람 사귀기도 싫지만,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는 거겠지만. 오히려 나는, 자라나면서 말이 없어진 것 같다. 어떻게든 말을 걸고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 하고 바둥거리던 예전과는 달리. 특별히 말이 없어도,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리 어색함을 실감하고 싶지도 않다.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대화를 듣는 걸 즐기기도 한다. 뭔가… 귀찮은 걸까. 그런가 하면 가끔 미칠 듯이 현란해져서 과장하며 다다다 말하는 때가 있다. 그래, 그런 때도 많다. 그 파장이 너무 커서, 내 친구들은 '네가 제일 말 많아!'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연락이 없어도, 애정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 역시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아는 건 기분 좋아. 그것만으로도 생의 의미를 찾게 된다. 그들을 보아서라도 죽을 수 없게 한다. 언제나 연락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안절부절하며 친구일까 아닐까를 의심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를 베스트 프렌드라 부르던 아이는 그렇게 떠나갔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최고의 친구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왜였을까, 이유가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지극히 바라지만. 누구나에게 엄마처럼 따뜻한, 편한 존재였지만 절친한 친구가 없어서였을까. 지옥같은 시절을 함께 보내서였을까. 모른다. 하지만 의심하지 않는다. 못한다. 오랫동안 보지 않아도, 연락하지 않아도. 그래도 나 역시 믿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by 미르시내 | 2006/04/23 03:40 | 상념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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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시온 at 2006/04/23 10:07
일방적인 감정이 아니라 서로 줄수 있는, 보듬아 줄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되어 정말 좋다 싶은 분이 계세요.처음엔 뭣도 모르고 그분에게 내 감정을 강요했나 싶지만..시간도 흐르고 보니 그분도 정을 주셔서 얼마나 좋았던지-믿는다라는건 참 기분이 좋더라구요^^;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6/04/23 22:33
/시온님/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 수 있는- 그런 꿈같은, 허망한 상상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정말은 믿지도 않았을지 모르지만...
때론 실로 절실하게 '이런 게 가능한 거구나...'하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많지는 않아도,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건 좋아요, 참으로.
시온님께도 그런 분이 계셔서 행복하시겠어요. ^^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의 행복이 마련된 게 아닐까요.
내가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닌가, 싫은데 억지로 붙어 있게 하는 게 아닌가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그냥 이제는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으려고요.
(...저 '보듬다'라는 말은 어감이 참 따뜻한 것 같아요.
예전에 TV에서 누가 말씀하셨더라... 말이 예뻐서 국어사전에서 찾아봤는데
안 나오길래 이상하게 생각했었죠. ^^;)
그러고 보면- 노말시티에서도 세실이 이샤에게
'나 믿는다는 말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었죠.
믿음은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 같아요.
...이런 교과서적인 말이 아니더라도, 그저 그 말 자체로- 기분이 좋아요. ^^;
Commented by 元銘 at 2006/04/24 01:07
저에겐 언니가 그런 상대예요. 이힛.
저도 그래서 전에 그것때문에 매우 우울해하고 스스로 자학하기도 하고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건 역시 시간이 해결해주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그 때가 너무 억울했던 적도 많았어요.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6/04/27 14:10
/元銘/
어머, 정말? *-_-* 아이 좋아라. (...)
그렇지... 그런 건 언제나 신경쓰여.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하고,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만큼 편해진 사람들도 있고.
그냥 말하지 않은 채로, 표현하지 않은 채로 시간에 맡길 수도 있었을텐데.
그냥 그런 거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묻혀갈 수 있었을텐데. 뭐 할 수 없지만;
내 경우엔; 상대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가장 괴로웠던 것 같아. ^^;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억울해도, 지금 잘 지내고 있다면 응, 좋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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