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2월 24일
……그 곳에 올라서면
 2005년 9월 27일. 수능이 끝나면 미리내를 그리겠다고 했다. 세 번째의 수능을 준비하던 시절.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내를 그려서, 책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그려서, 완성해서……. 단지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느낌이 들었다. 방황하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오늘.

 어쩌다가 깨끗이 정돈된 책상 앞에 앉아 원고지를 꺼냈다. 미리내를 그리려 했다. 그런데. 첫 장면을 여는, 그 나레이션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예전에 플로피 디스켓에 넣어두었던 한글 파일을 찾아 열었다. '……그 곳에 올라서면'……. 그래… 이런 말들이었지. 음. 다른 파일도 있다. 등장인물…이며, 목차. 하나하나 다 열어 보았다. 쭈욱 읽어 내려갔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 나와, 내가 좋아했던 남자애와, 내 친구를 모델로 하여 만들었던 그들. 그런데, 잊고 있었다. 가을이가 피를 무서워하며 겁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는, 마파람이 비를 좋아한다는 것도. 프시케가 나비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리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신기한 단어의 조합들. 이렇게 기록된 것이 없었다면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10년 가까이 나와 함께 살아왔다고 생각한 미리내임에도. 기록은 2001년에서 멈추어 있다. 아아, 지독했던 2001년. 2004년에 다시 B'z라는 낯선 단어와 함께 등장한 하나의 흔적이 있다. 심장의 통증이 계속해온다. 다시 순간들을 기록해 나가야지. 그래, 프시케가 '미르님', '시내님'하는 것을 보니 참 기분이 묘하다. 시간이 흐른 거다.

 첫 장을 그린다. 그린다……. 예전에 똑같은 장을 그린 적이 있었다. 분명 공책에 그려서 잘 보관해 두었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의 플롯도 다 가지고 있는데 유독 왜 그것만 없는지. …그리는데,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 분명 따뜻한 곡선의 눈썹, 환희와 감격에 젖어 어쩔 줄 몰라하는 눈, 날카롭지 않은 코, 다정한 입술의 모양. 그 사랑스러운 표정이 되지 않는다. 옛날에 그렸던 그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지금 그것이 그려지지 않는다. 느낌이 다르다. 눈은 흐리멍텅할 뿐, 그 따뜻하면서도 감격에 겨운 눈빛이 나오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더부룩하다. 몇 번이고 전체를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화가 난다. 되지 않는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흉칙하다. 다 지워 버렸다. 이것도 시간이 흐른 걸까.
by 미르시내 | 2006/02/24 03:10 | 은하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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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시온 at 2006/02/25 01:57
표지가 너덜너덜한 연습장.샤프를 째깍이며 번진 연필자국.
칸도 무시하고,순서도 무시하고 순간 기억나는것들, 전혀 다른 내용의 글.
가끔 읽어보면 나 뭘쓰고 있지란 생각이 들정도로 차가워 졌습니다.그러다 정말...옛날글을,살아 움직이는 그런캐릭터를 보면 마구 부끄럽지만. 주말이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미리내님.^^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6/02/26 12:18
/시온님/
뭔가 옛날 그렸던 것들은 기술상으론 부족하지만
그 중에서도 굉장히 '예쁘다.'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어요.
글 같은 것도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글에 써 놓은 그 첫 장은 어찌어찌 완성했지만...
인간적인 면을 좋아했던 제 그림이 어느새 날카롭게 변한 것 같기도 해요.
기분 탓일까나... 감정을 가진 눈동자가...ㅠ_ㅠ 표정의 움직임이...
생각의 파편들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묻혀 버리고... 에엣. 기록해야겠습니다.
심장이 차가워져가는 것을 느껴, 시온...님. ^^ (이 대사가 맞던가-_-;)
이곳에서 미리내님이라 불리니 반가운 느낌이네요. 아하핫.
시온님도 좋은 주말 되시길! (엉엉 벌써 일요일이네요. ㅠ_ㅠ)
Commented by 元銘 at 2006/02/26 16:43
그런 그림이라도 좋아요! 편지만 써주세요!!!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6/02/28 14:00
/元銘/
네. OTL OTL OTL OTL OTL 으악 편지...;;;
아흑 생일 맞춰서 보내줄게. (?)
남이섬 잘 갔다 왔니. -┏ (말돌리기)
Commented by 팬더맨 at 2006/03/03 02:05
중학교때..한주에 1500원짜리 연습장을 한권씩 쓰던 연습량은 저멀리-..-;; 그래도 그당시 그림은 제법 남아있네요..아 풋풋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6/03/03 02:56
/팬더맨님/
전 고등학교 와서는 거의 안 그린 듯...ㅠ_ㅠ;
헤헤 정말 옛날에 그린 그림 보면 그리움이^^; 밀려와요~
저도 당시 그 그림의 느낌을 잊지 않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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