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20일
공간이 차단되어 있을 때의 두려움.
 2월 19일은 내가 태어난 날이다. 대체로… 24절기 중 하나인 우수(雨水)이기도 하다. (19일 또는 20일)

 또 2월 19일 하면 생각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TV 애니메이션 '천사소녀 네티(괴도 세인트 테일)'가 종영한 날이라는 것이다. 내가 TV에서 천사소녀 네티를 처음 본 것은 KBS 4화(일본에선 12화)로 방영되었던 '화이트 크리스마스' 편.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크리스마스에 가까운 날이어서 일부러 앞으로 당겨 방영한 거라고 하는데, 집에 놀러와 있던 동네 친구와 함께 그 에피소드를 보면서 나는 크리스마스 특집 애니메이션인 줄 알았더랬다. 눈이 내리는 장면도 나오고, 그럴 만도 하지. 그 후 그게 매 요일마다 하는 거라는 걸 알고 꾸준히 봤었다. 최종화가 방영되는 날, 동네 슈퍼에서 신문에 나온 TV 편성표를 보던 기억…. 그것이 1997년 2월 19일. 이런 기억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천사소녀 네티는 나에게 매우 특별한 애니메이션으로 남아 있다.

 두번째는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가 일어난 다음날이라는 것이다. 2003년 2월 18일. 당시 고 3 올라가는 나는, 방학 보충수업이 종료된 후에도 학교에 나가 공부하곤 했다. 1학년들이 생활하던 신관을 열어놓고, 공부할 사람은 와서 하라고 했었다. 2월 19일은 내 생일이라 집에 있던 케이크를 몇 조각 학교에 가져갔었다. 친구 몇 명밖에 없었던 텅 빈 교실 교탁에서 신문 1면의 대구 지하철 참사 기사를 보았는데, 그 묘한 상황이 기억에 남아 있다.

 어제, 약속이 있어 빨리 가기 위해 용산으로 가는 급행 열차를 탔었다. 의자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간 씽씽 잘 달리던 열차가 역에 정차하더니 출발하지 않는 것이다. 차장이 방송을 한다. 이어폰을 끼어서 잘 들리지 않는다. 갑자기 두려워저서 노래를 꺼 버렸다. 잠시 후 다시 방송이 나오더니 비상 버저가 눌러져서 출발을 할 수 없단다. 그러면서 아이가 끼었다느니 하는 대화가 언뜻 들렸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잠시 정차해 있다가 출발한다. 다시 죄송하다는 방송이 나온다. 다음 정거장에 도착. 그런데 아까 울린 비상 버저가 아직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할 수 없다고, 손님께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방송이 나온다. 열차는 정지한 채 문도 열려 있다가, 잠시 후 다시 출발한다. 다시 방송. 출발이 지연되어 죄송하다며 '비상 버저는 테러 등 긴급상황에만 울리도록 되어 있으니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하신다. 무슨 일이었을까.
 테러라는 말에 순간 예전의 대구 지하철 참사가 떠올랐다. (굳이 의미를 매기자면 어제는 12월 19일, 내 생일이 두 달 남은 날. 음, 친구의 취업을 축하하며, 그리고 나름대로 내 생일 두 달 남은 걸 축하하며(?) 케이크를 잘랐던 날이다.) 그 후 얼마간 있었던, 몇몇 모방 범죄와, 서울 지하철 2호선에서 갑자기 열차가 멈추고 불이 꺼져서 승객들이 혼란에 빠졌던 사건도 연달아 기억난다. 음, 전기선이 불꽃을 내며 타버렸던가. 승객들은 대피했으나 대구 지하철 참사와 겹쳐져서 꽤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는데, 이게 맞나. 아무튼 그 날, 같은 시간은 아니지만 나도 2호선을 탔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
 혼자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거리를 걸을 때, 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대부분 이어폰을 끼고 있다. 그런데 지하철 같은 경우, 자주 있는 일이지만서도 열차가 역에서 멈추더니 출발하지 않는다든가, 밤에 달리는데 갑자기 불이 꺼져 버린다든가 하고, 또는 뭔가 방송이 나온다든가 하면 이어폰을 빼게 된다. 이어폰을 끼고 있다가, 혹은 지하철에서 잠들어 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나 하는 심리일까. 나는 바깥 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볼륨을 높여 듣지 않는다. 귀에 안 좋기도 하지만, 완벽히 공간이 차단되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그것이 무섭다. 귀로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서도 눈으로는 끊임없이 바깥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밤에 잠자리에 누워 어둠 속에서 이어폰을 끼고 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볼륨을 높여 음악을 듣다 보면, 5분도 안 되어서 스스로 꺼 버리고 만다. 이러는 동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거 다 생각하다 보면 신경쓰여서 즐길 거 하나도 없겠지만, 그런 두려움이랄까. 말은 이렇게 해도 졸음을 못 이겨 잠들고, 음악이 듣고 싶어서 이어폰을 끼는 게 일상이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by 미르시내 | 2005/12/20 21:10 | 상념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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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존슨 at 2005/12/20 21:26
음...폐소공포증인가요...전 가끔 조용한 방 안에 혼자 있을때 '뚜우-'하는 소리만 들릴때가 무섭더군요. 잘때는 완벽한 어둠을 만들고 잡니다. 보일러의 작동표시등조차도 가리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더군요...
Commented by 텐(天) at 2005/12/20 21:31
저는 바깥을 다닐 때는 음악을 꽤 크게 틀어 놓고 다니는 편입니다. 지하철의 소음이나 버스 소음때문에 음악이 안 들리는 것이 싫어서요. 하지만 그 외의 곳에서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악을 크게 틀어 놓으면 왠지 불안해져서 안 하게 되더라고요. 스피커로 들을 때도 꽤 작게 해놓고 듣습니다. 크게 들을 때는 오로지 이동 시간 중만이에요. 하지만 확실히 저도.. 버스가 갑자기 서거나 지하철이 섰을 때는 이어폰을 빼곤 합니다. 제가 모르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지하철이 정말 싫어요. 처음에는 이 정도로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몇 번 이상한 사람이 옆자리에 앉는 일을 연속으로 당하고 나서, 그리고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답답하다고 느끼게 되고 나서부터 정말로 싫어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두 배가 걸리더라도 정말 바쁘지 않은 이상은 버스를 선호해요. 지하의 폐쇄된(?) 공간에서 사람만 빽빽하게 있는 그곳이 정말 싫다고 느끼게 되자 견딜 수 없이 싫어지더라고요.;
Commented by 존  at 2005/12/20 22:26
오늘밤엔 무슨일을 할까~ 누구의 물건을 훔칠까~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5/12/20 22:44
/존슨님/
폐, 폐소공포증!!! 그런건가요! OTL 아직 죽을 만큼 괴로운 상태는 아니...지...만......ㅠ_ㅠ
밤에 잠자려고 불 끄고 있으면 소리가 민감하게 다 들리잖아요.
그 때 뭔가 부시럭 하면 전 도둑 들어온 줄 알고 신경을 곤두세워요. -_-;
아, 그러고 보니 전에 옥상에 제가 별 보려고 올라갔을 때(주택이거든요)
엄마랑 동생이 도둑인 줄 알았다는 뒷이야기가. ^^;
아버지 안 계실 때여서 더 무서웠다고;
뚜우 하는 소리 하니까 생각나는데 제가 어렸을 때
어둠 속에 기어다니는 레이저 같은 게 보인다고 무서워했어요.
어둠에 집중하면 보이는 그... 뭣이냐; ...;
아무튼 저도 완벽한 어둠이 좋은데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다 보이는 게 싫어요. (응?)
전 째깍째깍 시계소리 들리면 잠이 안오더라고요;
예전에 방에 시계 놨다가 얼마 안 돼서 치워버렸어요;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5/12/20 22:53
/텐님/
저도 크게 듣고 싶은데, 참는 편이지만 정말 지하철 소음이나 버스 소음은 너무 심해요. -_-;
스피커로 들을 때나 오디오로 들을 때도 그렇게 크게 듣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제 경우엔 바깥에 소리 새어나갈까봐...이지만;)
그렇죠 왠지 불안...; 비상시(?) 이어폰을 빼는 것은 제가 이상한 게 아니었군요. ^^;
음, 전 지하철이 버스보다 안 흔들려서, 손잡이 안 잡고도 서 있을 수 있는 게 좋았는데
지하철이 안 좋은 점이 창문을 열 수 없다는 거요;;;
그리고 의자가 창가를 따라 있어서 창밖을 보기가 힘든 거요. 보려면 앞사람 쪽을 봐야 하는데;
이, 이상한 사람이라니 대체 어떤...;;; 우악; 지하철은 확실히 그런 게 더 신경쓰이더라고요.
괜히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고...;
마지막 문장을 읽으니 저도 싫어지려고 하잖아요!;
버스를 타고 창가에 기대어 가다 보면 어느 때는
이대로 영원히 계속 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5/12/20 22:53
/존님/
아니에요! 오늘밤엔 무슨일을 할까~ 누구에게 기쁨을 줄까~예요! (...)
천사소녀 네티는 나쁜 도둑이 아니에요! (이 대사가 맞나;)
나쁜 마음 끝이 없는 욕심 멀리멀리~ 사라지면~
처음엔 그 노래 세인트 성우분이 부르시는 줄 알았어요. 목소리가 비슷해서...;
아, 옛날 만화 주제가가 그리워져요. -_-;
Commented by 존슨 at 2005/12/21 01:34
그러고보니 옛날에 이런 일화가 있었습니다. 지인께어 시위가 격렬하던 어느날 책가방에 세인트테일
만화책을 잔뜩 가지고 가다가 전경에게 불심검문을 받는데..가방을 열자 가득한 세인트테일..
동료까지 불러와서 보고 킥킥대는 전경...아 물론 제가 그런거 아닙니다.
...진짜로요 ;ㅁ;
Commented by 미르시내 at 2005/12/21 22:15
/존슨님/
도, 동료까지 불러와서 우하하^^;;;
그 전경들 정말 웃겼을 것 같아요~ 심각하게 가방 열었는데 샤방샤방 웃고 있는 세인트 테일~
그런 일화가 많을 것 같아요. 지인분께서도 기억에 남으실 듯...^^;
저도 절판되고 나서야 겨우겨우 구했는데(절판 너무 빨리 돼요;)
어디서 구했더라; 아무튼 대여점에서 쓰던 거였는데요.
집에 도착해서 신나서 보다가 중간중간에 찢어진 페이지 보고 정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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