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2월 22일
Clapton Is God! : 에릭 클랩튼 내한 공연 (Eric Clapton Live In Seoul, 2011)
2011.2.20 올림픽 체조경기장



 보고 싶었다. Layla의 묵직한 인트로가 흘러나오자 일렁이던 사람들의 물결을 잊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듣고 싶었다.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격렬한 기타 소리를 감싸안는 피아노 연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2007년 1월 23일, 에릭 클랩튼의 내한 공연이 있은 후로 꼬박 4년이 흘렀다. 청소년기의 추억만을 붙잡고 간 공연에서 나는 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고, 노래를 찾아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에릭 클랩튼에 대해 알게 되면 될수록 공연에 다시 한번 가고 싶은 마음만 깊어졌다. 단 한번이라도 좋아, 그리운 Layla를, 기타를, 피아노를 들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내가 외국에 나가서라도 공연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에릭 클랩튼의 공식 홈페이지에 방문하게 된 것은 2010년이 되어서였다. 요즘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도통 몰랐는데, 홈페이지의 TOUR란에는 공연 일정이 빼곡했다. 작년 초부터 에릭 클랩튼은 미국 전역을 비롯한 유럽의 각 도시를 돌며 공연을 했다.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지만, 나는 당장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현실 속에서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고 있을 뿐이었다. 시험에 합격하면 다같이 놀러가겠다고,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막연했던 소망은 점차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미국에 가면, 에릭 클랩튼의 공연에 찾아가리라.
 2010년 가을에 새 앨범 <CLAPTON>이 나오면서, 공식 홈페이지에 2011년 투어 일정에 대한 이야기가 살짝 비쳤다. Europe, Asia, and U.S. 그 때까지만 해도 에릭 클랩튼이 우리나라에 다시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일본이라면 자주 가니까 잘해야 그 쪽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혹 시간이 잘 맞는다면 공연을 보러 나가볼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포털사이트에 'Layla'를 검색해보고 있던 중이었다. 턱을 괴고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던 중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를 발견했다. '에릭 클랩튼 세번째 내한 공연'?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설마 그럴 리가! 서둘러 날짜를 확인했다. 바로 하루 전 뉴스였다. 티켓 오픈 일주일 전에 운좋게도, 나는 에릭 클랩튼 내한 소식을 접했다.
 손을 떨며 예매한 자리가 맘에 들지 않아 매일 새벽 2시 취소표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보냈다. 아무 생각 없이 평소처럼 일반 스튜디오 앨범만 듣다가 공연 한 달 전이 되어서야 서둘러 <CLAPTON>을 꺼내 듣고 <Layla and Other Assorted Love Songs>를 구입했다. 2007년 서울 공연 때 연주되었던 곡들을 오랜만에 다시 듣기 시작했다. 최근 것과 함께 앞서 열린 2011년 공연의 셋리스트를 찾아 들으며 열심히 가사를 외웠다. 공연 일주일 전에 약한 감기에 걸렸고, 공연 3일 전에는 갑작스레 모든 소리가 한 단계 낮게 들리는 현상까지 생기기도 했다. 바로 직전이라 정말 당황하고 걱정도 많이 했지만 다행히 하루 만에 나아졌다.

 2011년 2월 20일은 내 생일 다음날이었다. 생일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아버지와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지난번 공연도 함께 가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었다. 혹시 이번에도 그러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토록 고대했던 것과 달리 공연이 다가와도 나는 큰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이 습관처럼 노래를 듣다가, 라이브를 상상하곤 비로소 배시시 미소지을 뿐이었다. 공연날 아침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하고 밖에 나오는 순간, 나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날씨는 맑고 화창했다. 나는 길을 걸으며 줄곧 아이처럼 재잘거렸다.
 몽촌토성 역 앞에서 식사를 한 후, 남문을 통해 올림픽공원으로 들어섰다. 평소 같으면 올림픽공원 역에서 내려 공연장으로 걸어갔을 터였다. 처음 보는 풍경과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을 구경하며 산책하듯 천천히 걸었다. 이 쪽에서 체조경기장으로 가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싶었다. 역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두 함께 무리지어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그 느낌도 상당히 좋은데 말이지. 동질감, 두근거림, 기분 좋은 소란.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는 7시 30분 전. 간단하게 사진을 찍고 입장했다. 체조경기장 1층에 앉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들떠 있었다. '어, 여기 막 지하로 들어가!'



01. Key To The Highway
 만남의 순간은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7시가 조금 넘어 장내에 불이 꺼지자, 어둠 속에 사람들의 환호가 울려퍼졌다. 무대에 불이 들어오고 왼쪽 끝에서부터 하나 둘 밴드 멤버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드디어 에릭 클랩튼이 나오자 사람들의 환호는 극에 달했다.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그렇게 무심히 걸어나온 그들은 악기를 준비한 후 바로 연주에 들어선다. 아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지! 포스터에도 그려져 있던 하늘색 펜더 스트라토캐스터가 눈 앞에서 빛났다. 실제로 보면 비취색에 가까운 아주 예쁜 기타다.
 첫 곡은 Key To The Highway. 사운드는 강렬했고, 키보드 역시 흥겨웠다. 2007년에 갔을 때는 몰랐던 곡이었는데, 이렇게 알고 들으니 또 색다르다. 포문은 열리고, 기억은 눈 앞에서 재생되기 시작한다. 에릭 클랩튼이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02. Going Down Slow
 Pilgrim과 늘 헷갈리곤 했던 Going Down Slow. 특유의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몽환적인 느낌이랄까. 직접 들으니 정말로 넋을 잃고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 순간 에릭 클랩튼이 무대에서 손을 내밀면 멍하니 따라갈 것 같다. 아, 이건 당연한 건가? 
 이 노래의 가사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는데, 알고 나니 노래의 분위기가 한층 묘하게 느껴진다. 이런 가사일 줄은 미처 몰랐지만 생각해 보면 꽤 어울리는 것 같다. 후반부에는 'Going Down Slow'라는 코러스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에릭 클랩튼의 기타는 끊임없이 몰아치며 관객들을 빨아들인다.
 
03. Hoochie Coochie Man
 묵직한 사운드가 맛깔나게 연주되는 Hoochie Coochie Man. 이번 투어에 두 대나 참여한 키보드는 초반부터 빛을 발했다. 크리스 스테인턴과 팀 카몬이 번갈아가며 현란한 키보드 연주를 선보였다.

04. Old Love
 Old Love!!! 너무나 좋아하는 Old Love!!!!!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이 날의 Old Love는 굉장히 좋았다. 원래의 블루지한 느낌은 그대로 가면서, 중간에 기타 솔로를 얼마나 멋지게 해주시던지! Old Love는 어쿠스틱이 어울릴 거라고만 생각해왔던 터라 이 날의 연주는 무척 신선하고 특별했다. 기타 솔로는 꽤 길었다. 이제 끝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시점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치고 들어가며 점점 풍성한 연주가 진행되었다. 절절하고도 매혹적이었다. 감정이 고조되다 못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다시 보컬이 나오는가 싶더니, 키보드로 순서가 넘어갔다. 흑인 연주자 팀 카몬 차례였다. 기계음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Old Love~ Old Love~'을 반복했다. 처음엔 노래하는 것인지 키보드로 저런 소리를 내는 것인지 몰랐는데, 아마 노랫소리를 전자음으로 변환시켜 주는 마이크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중에는 신경질이 난 듯이 마이크를 휙 치워버리고 연주하더라. 푸하핫.
 그렇게 Old Love는 10분도 넘게 계속된 것 같았다. 꽤 긴 시간인데도 흡입력이 굉장했다. 몇 번이고 감탄하면서 행여 놓칠세라 집중해서 들었다. 원곡, 기타 솔로, 키보드 솔로, 서로 다른 느낌의 연주들이 어찌나 잘 어우러지던지. 각각의 파트로 넘어가는 과정도 물 흐르는 듯 매끄러웠다.

05. I Shot The Sheriff
 아, 이 곡 역시 기대했던 곡이다! Old Love와 I Shot The Sheriff를 내 귀로 직접 듣게 될 줄이야! 노래가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흥겨운 전주와 함께 여자 백보컬들의 노래로 시작했다. 에릭 클랩튼의 공연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뒤에서 몇 명의 여자들이 몸을 흔들며 노래하는 것이 그 때는 그렇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노래만 들을 때는 코러스는 주의깊게 듣게 되지 않을 뿐더러, 차마 그런 모습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곧 에릭 클랩튼의 본격적인 보컬이 겹쳐졌다. 가사도 리듬도 익살스러운 곡. 즐거웠다.
 후반부의 기타 솔로에서는 소리가 굉장히 맑게 울렸다. 마냥 레게 템포인 곡이라고만 생각했던 터라 의아했지만, 상당히 어울렸다. 기타는 점점 고조되어 나중엔 어쩐지 흐느끼는 느낌이 되었다. 원곡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같은 곡이라도 이렇게 무한하게 변화할 수 있구나, 음악이란 참 아름답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06. Driftin'
 다섯 곡이 끝나자 의자와 어쿠스틱 기타가 나오는 등 무대가 새롭게 꾸며졌다. 지금부터는 기타를 바꿔 앉아 연주하는 시간. Change The World? Signe? 비슷한 첫 구절이 연주되는가 싶더니 Driftin'으로 넘어간다. 모두가 엄청나게 환호했거늘, 에릭옹,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예전에 Unplugged에서 Old Love를 연주할 때, Layla의 전주를 슬쩍 선보였던 게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에게 가만히 기대어 듣고 싶어지는 노래. 나긋나긋한 기타 연주는 여전하다.

07. Nobody Knows You When You're Down And Out
 다소 경쾌한 리듬으로 Nobody Knows You When You're Down And Out을 시작! 자주 듣게 되는 곡이다. 모두가 반가워하며 즐거워했다. 우울하다고 할 수도 있는 가사 내용과는 달리 가볍고 즐겁게 연주해서, 왠지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까딱하게 된다.

08. River Runs Deep
 이쯤에서 기타를 바꾸었던가? 검정색과 갈색 물결 무늬가 있는 기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바로 ES-335라고 한다. 사실 내가 있는 102구역에서는 기타의 상판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에릭 클랩튼이 몸을 오른쪽으로 틀고 기타를 잡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것도 어쿠스틱 기타인가 하고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다. 가뜩이나 손가락의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는데, 이젠 기타 자체가 아예 보이지 않다니 괜히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앞서 선 채로 연주할 때에도 노래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오른쪽 뒤로 물러나곤 해서 조금 아쉬웠는데, 이건 너무하잖아! 흑흑. 바로 앞에 실물이 있는데 스크린 보기도 그렇고.
 드디어 새 앨범 <CLAPTON>의 수록곡들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River Runs Deep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끊임없이 물 아래로 침잠해가는 듯한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음울하면서도 신비로운 그런 느낌이랄까.

09. Rocking Chair
 역시 <CLAPTON>의 수록곡. 신곡들은 반응이 적은 편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이번 앨범에는 어쩐지 죽음에 대한 뉘앙스가 담긴 곡들이 많은 것 같아 기분이 묘했는데, 그래도 이 곡은 비교적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 모든 것을 달관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랄까. 느긋한 리듬에 정말 Rocking Chair에 앉은 느낌마저 들었다.

10. Same Old Blues (song by JJ Cale)
 문제의 Same Old Blues. 나는 이 곡을 <Behind The Sun>에 수록된 곡으로 알고 갔다. 에릭 클랩튼 음악의 뿌리는 블루스라 하지만, 정작 블루스에 대해 큰 애정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반했던 곡이었다. 장중하게 불려지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같은 곡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셋리스트를 미리 알고 갔다고 하더라도 공연을 보면서 다음에 나올 곡을 예측하기란 힘들다. 공연을 보고 있으면 모든 생각이 증발되기 일쑤다. 그래서 낯선 멜로디에 당황하면서 '원래 이 다음에 나올 곡이 뭐였지?'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에릭 클랩튼의 노래에 이런 곡은 없었다. 혹시 우리나라에서만 연주하는 곡인가 하고도 생각해 봤다. 가사를 알아들으려 애써 봐도 잘 안 되어서 이내 포기하고 그냥 연주에만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억 속에 꾹꾹 담았다. 쫀득쫀득한 연주가 인상적이었던 곡.

11. When Somebody Thinks You're Wonderful
 <CLAPTON>의 수록곡, 그 세번째. 의당 노래가 시작되어야 할 부분까지 노래 없이 연주가 계속되길래 혹시 연주만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뭐, 이것도 좋지ㅡ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 바퀴를 쭉 돌며 연주한 후에야 에릭 클랩튼이 마이크에 입을 대었다. 이 노래는 쉬운 영어로 되어 있고 내용도 단순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명랑한 템포의 곡이 너무 좋다. 때로는 이런 노래가 큰 감흥을 줄 때도 있는 것이다. 몸을 으쓱으쓱하며 입모양으로 따라불렀다. 특히 'And how you meet the mornig / And you gaily swing along / At night you may be weary / but your heart still sings a song' 하는 부분이 너무 좋다.

12. Layla
 Layla, 아아아아아, Layla!!!!! Layla가 어쿠스틱으로 연주될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Layla가 Wonderful Tonight 다음이 아닌 것부터가 이상했다. 혹시 우리나라에서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 보았지만, 밴드에 세컨 기타가 없으니 원곡은 안될 거라는 말에 수긍하며 일찌감치 기대를 접었다.
 라이브에서 Layla를 연주할 때에는 본 연주에 앞서 길고 고요한 멜로디가 진행되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라도레파레도레' 하는 Layla의 유명한 인트로가 터져나오는 것이다. 에릭 클랩튼이 의자에 앉은 채로 그 음률을 연주하기에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그 멜로디는 폭발하지 못한 채로 잠잠하게 머물렀다.
 그토록 그리던 Layla인데, 나는 바로 몇 미터 앞에서 연주되고 있는 Layla를 들으면서 자꾸만 아쉽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은 그의 연주 때문일까, 내 마음 때문일까.

13. Badge
 Layla를 끝으로 다시 일어나 펜더를 멘 에릭 클랩튼! 바로 시작된 곡은 Badge였다! 단연 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분명 라이브 앨범에서 들었던 그대로인데, 어찌나 신나던지! 사실 이 때부터 일어나 방방 뛰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Badge는 중간에 잠시 고요해지는 부분이 있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거의 사그라들어, 노래가 끝나는 것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다시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 소리는 심장을 나긋나긋 두드리듯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팡 하고 사운드가 터진다. 곧이어 후렴구가 반복되는 부분에서는 목소리를 높여 따라불렀다. 아아, 이대로 계속 노래가 이어질 것만 같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14. Wonderful Tonight
 빠질 수 없는 명곡, Wonderful Tonight이다. 작년 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의식적으로 안 듣던 노래였는데, 역시 명곡은 명곡이더라. 오랜만에 듣게 된 Wonderful Tonight이 라이브라니 그럴 만도 할까. 그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내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정말 좋았다. 지금까지 내가 들은 Wonderful Tonight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기타는 영롱하게 울리며 공간을 채웠고, 에릭 클랩튼의 목소리는 힘있고도 또렷이 귀에 들어왔다.
 객석은 이내 조용해졌다. 모르겠다, 내가 오직 에릭 클랩튼에게만 집중하고 있어,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던 것인지도. 무난하고 담백하기까지 한, 군더더기 없는 노래와 연주였다. 각종 애드립이 들어간 다른 곡들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가슴을 울렸는지도 모르겠다.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가슴이 찡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Layla를 한창 들을 때 에릭 클랩튼은 이제 저 노래를 부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었는데, Wonderful Tonight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하기란 또 처음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분은 특히나 더.
 'I feel wonderful because I see the love light in your eyes / And the wonder of it all is that you just don't realize how much I love you…….'

15. Before You Accuse Me
 왠지 Nobody Knows You When You're Down And Out이 나오면 이 노래도 꼭 나와야 할 것 같다. 역시나 발랄하다 싶을 정도로 경쾌하게 연주. 키보드가 번갈아가며 연주하는 것은 변함없다.

16. Little Queen Of Spades
 처음에는 굉장히 블루지한 느낌으로 연주한다. 좀 늘어지는가 싶더니 역시 양쪽의 키보드 연주가 나오면서 좌중을 휘어잡는다. 이번에는 키보드 하나가 끝날 때마다 에릭 클랩튼이 '크리스 스테인턴', '팀 카몬' 하면서 소개를 한다. 스티브 겟이나 윌리 윅스의 솔로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더라. 세션 소개도 안 하는 에릭 클랩튼…… 키힝.

17. Cocaine
 익숙한 전주, Cocaine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환호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 아부다비와 싱가포르 공연에서는 Crossroads였지만, 연이은 방콕과 홍콩 공연에서는 그 대신 Cocaine이 불려진 것을 보고 내심 우리나라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Crossroads보다 Cocaine이 더 좋은걸ㅡ
 역시나 열광적인 이 곡! 104구역 쪽에서 어떤 사람이 앞으로 뛰쳐나온 것이 보였다. 경호원이 그를 막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서 공연을 즐겼다. 노래가 진행되자 사람들이 일어서더니 하나 둘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앞으로 뛰어나가 펜스를 잡고 뛰며, 에릭 클랩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부터는 흥분의 도가니라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리듬을 따라 맘껏 공연을 즐긴 것 같다. 내 옆의 사람은 <Slowhand> LP판을 들고 있었다. Cocaine이 수록된 바로 그 앨범이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더니 광분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전히 두 키보드리스트는 번갈아가며 연주하고, 키보드의 향연이 이어졌다. 우리는 모두 노래를 따라불렀지만, 특히 'She don't lie, she don't lie, she don't lie, cocaine'이란 후렴구에서 한껏 목청을 높였다. 흥겹고 즐거웠다. 2007년에도 1만명이 '코케인~' 하고 외치는 소리가 공연장을 울렸더랬지. 마지막이 되어서야 에릭 클랩튼은 'She don't lie, she don't lie, she don't lie'까지만 한 채 마이크에서 물러나고, 관중들이 'Cocaine'을 외치며 노래를 완성했다. 곡이 끝나면 늘 외치는 'Thank you'가 이렇게 가슴에 와닿을 줄이야.

18. Crossroads
 에릭 클랩튼과 세션들이 무대 뒤로 들어가고, 우리는 '앵콜! 앵콜!'을 외치며 열심히 에릭을 불렀다. 그리고 그는 이에 응했다.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와 시작한 곡은 바로 Crossroads! 아니, 앵콜이 Further On Up The Road가 아니란 말인가? 다른 나라에서는 전부 Further On Up The Road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Cocaine과 Crossroads 모두 2007년 공연 때 들었던 곡이었지만, 난 Further On Up The Road보다는 Crossroads가 더 좋으므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Key To The Highway에서 Crossroads까지, 고속도로를 달려 마침내 교차로에 다다랐다. 익숙한 리듬에 몸을 맡기고, 환호하는 사이 공연은 끝났다. 에릭 클랩튼은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몸을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기도 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곧이어 세션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연거푸 인사를 한 뒤, 정말 이게 끝이라는 듯 무대에서 물러났다. 앵콜이 한 곡 뿐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대 앞을 떠나지 못하고 에릭을 불렀다. 영원히 이대로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불이 켜지는 순간, 공연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2시간이 마치 20분 같았다. 에릭 클랩튼은 내 눈 앞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렇게 그리던 모습을 단 1초라도 놓칠까 싶어 오직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음악에 취해 몸을 맡기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기타를 연주하는 손가락이 아닌, 에릭 그 자체만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에릭 클랩튼은 <CLAPTON> 앨범 커버 사진보다 약간 머리를 자른 듯했다. 좋아 보였다. 직접 본 에릭 클랩튼은 변함없이 영락없는 음악인이었다. 기타를 연주하며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셔츠 소매를 걷기도 하며, 공연 중간중간에 가끔 미소를 짓기도 했다. 누군가가 에릭을 향해 'I love you!'라고 외치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웃으며 끄덕끄덕하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 그는 늘 그렇듯이 노래가 끝날 때마다 'Thank you'를 연발했다. 에릭 클랩튼이 공연 때 하는 유일한 말이다. Tears In Heaven을 듣던 중학교 때부터 수없이 들은 그 말은 너무나 정겨웠다. 특유의 톤이 반갑고 또 반가웠다.
 이번에는 에릭 클랩튼 혼자 기타를 맡아서인지 '기타의 신'이라는 그의 별칭이 잘 드러난 공연 같았다. 감성 충만한 연주도, 그리운 그 목소리도 그대로였다. 그렇게 기타를 치면서 쉼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에 놀라는 한편, 아직 정정하신 듯해서 마음이 놓인다. 그토록 염원하던 Derek & the Dominos의 Layla는 듣지 못했지만, 다른 곡들이 워낙 좋아서 괜찮았다. ……라고 말하면 거짓말일까나? 2007년에는 Derek & the Dominos 버전의 Layla를 들었으니 이번엔 Unplugged 버전의 Layla를 듣는 것도 좋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 문제는 2007년 공연에서는 내가 에릭 클랩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상태라 Layla의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벅찼다는 느낌과 희미한 이미지로만 남아있다. 이번에도 Wonderful Tonight-Layla-Cocaine-Crossroads로 이어지는 구성이었다면 한결 더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텐데. 에릭 클랩튼은 이제 Layla를 어쿠스틱으로만 연주할 셈인가. 또 하나, Sunshine Of Your Love나 White Room을 많이 좋아하는지라 언젠가는 꼭 듣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그냥 괜히 아쉽다. Cream 시절의 두 곡은 이제 영상으로밖에 볼 수 없는 걸까?
 어찌됐든, 이로써 내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에릭 클랩튼을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그 동안에 수많은 내한 공연을 갔지만, 이렇게 염원하던 사람을 만나는 것은 또 처음이라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처음 에릭 클랩튼을 만날 때에는 나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두번째 만날 때에는 조금이나마 그의 음악을 즐기던 상태였다. 앞으로 세번째 만남이 있다면, 아마 내가 기타를 배운 후라고 생각한다. 그 때는 그의 음악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단 한번의 기회라고 생각해 공연의 광경을 눈에 꾹꾹 담았으며, 끝난 후에는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음악으로 충만한 환희의 감정, 마냥 가슴 벅찬 느낌 이외의 표현 못할 무언가가 마음을 꾹 눌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웬일인지 별로 좋아하지 않던 Unplugged 버전의 Layla를 흥얼거리고 있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활동해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또다시 그를 만날 날을 그리며 살아갈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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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 Clapton & His Band

Eric Clapton    -  Guitar          / Vocals
Willie Weeks    -  Bass Guitar / Vocals
Steve Gadd     -  Drums
Chris Stainton  -  Keyboards
Tim Carmon    -  Keyboards  / Vocals
Michelle John  -  Backing Vocals
Sharon White   -  Backing Voc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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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 LIST

01. Key To The Highway
02. Going Down Slow
03. Hoochie Coochie Man
04. Old Love
05. I Shot The Sheriff


SEATED

06. Driftin'
07. Nobody Knows You When You're Down And Out
08. River Runs Deep
09. Rocking Chair
10. Same Old Blues (song by JJ Cale)
11. When Somebody Thinks You're Wonderful
12. Layla


STANDING

13. Badge
14. Wonderful Tonight
15. Before You Accuse Me
16. Little Queen Of Spades
17. Cocaine


ENCORE

18. Crossro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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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이전 공연 후기는 여기에. 이 글을 지금 보면 많이 부끄러운데, 먼 훗날에 오늘의 후기를 보게 되면 또 얼마나 낯뜨거울까. 사실 지금도 괜히 아는 건 없으면서 떠드는 것 같아 좀 머쓱하긴 하다. 괜찮아, 괜찮아. 좋아하면 되는 거죠. 즐기면 되는 거죠.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꾸벅.

P.S.2.
 공연이 끝나고 장내에 불이 켜지자 나는 자리로 되돌아왔다. 짐을 챙기고 있는데 무대 쪽에서 작은 소란이 인다. 무대 앞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스탭이 종이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아, 셋리스트가 적힌 종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잡으려 손을 내밀고, 종이는 구겨진 채로 사람들 머리 위로 통통 튄다. 으헝, 받은 사람 좋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좀 남아있을걸…….

P.S.3.
 지난 2007년 공연에는 표 사기도 바빠 기념품이라곤 아무 것도 사지 못해서, 이번 공연에는 꼭 종류별로 구입하리라 다짐했다. 공연 전에 기념품샵에 들르려고 했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시간이 촉박해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공연을 보고 나오니 바로 눈 앞에 기념품샵이 있다. 대체 어디서 뿅하고 나타난 거니.
 게다가 거의 마지막에 나와서 남은 건 별로 없었다. 두 종류의 티셔츠와 캡모자, 피크 모양 열쇠고리 몇 개뿐. 티셔츠 하나랑 열쇠고리를 사려고 했더니 현금이 모자라……. 카드는 안 된대……. 엉엉, 고작 4000원이 없는 게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다. 돈 없는 자의 설움이여. 결국 고민하다가 티셔츠 하나밖에 못 샀는데, 나중에 입어보니 예쁘긴 해서 좀 마음이 풀렸다.
 집에 와서 다른 티셔츠들은 어떤가 하고 찾아봤는데 내가 산 게 제일 예쁜 것 같아 다행이다. 포스터는 아예 판매를 안한 듯하다. 포스터가 좀 허술하긴 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공연 전에 홍대에서 포스터나 뜯어올 걸 그랬다. 에릭 클랩튼 얼굴에 먹칠할까봐 관뒀는데. 아버지께서도 공연 전에 기념품샵을 봤는데 포스터 얘기는 없었다고 한다. 아니 아버지 기념품샵이 있었으면 저에게 먼저 말해주셔야지 그걸 나중에 말씀하시면 어떡하나요 엉엉 내가 그걸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그래, 많이 놓친 것 없는 것 같아 다행인데 엉엉 내 열쇠고리……. 공연 전에 알았으면 어떻게든 돈을 융통해봤을 텐데 아쉽다. 30분만 더 일찍 올걸……. 전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기념품샵 위치 못 찾아서 기념품 못 샀나요. 누구 피크 모양 열쇠고리 있으신 분 저에게 파시면 감사하겠습니……. 엉엉엉.

P.S.4.
 아버지께서 좋아하셔서 나도 기분이 좋다. Cocaine이 맘에 드신다고. Cocaine이라면…… 가방 아버지께 맡기고 앞으로 뛰쳐나간 그 때인가. 이런 무책임한 딸 되겠습니다그려. 그러고 보니 전철에서 가방 고정핀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공연장에서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고, 나오는 길에 떨어진 것 같은데……. 잘 떨어진다 싶더니 결국 잃어버리게 되는구나. 어째 어디 가기만 하면 뭘 하나씩 잃어버리고 오는 것 같다.

P.S.5.
 공연 후기 쓰는 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이제 공부 좀 하자. 추후에 더 떠오르는 일이 있으면 수정해야지.
by 미르시내 | 2011/02/22 23:45 | 취향 | 트랙백 | 덧글(10)
2009년 10월 01일
친구가 없어서는 아니지만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무덤이 내 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가지 말아라
나를 위해 한번만 노래를 해주렴
나나 나나나나 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 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 든다

마음을 다 주어도 친구가 없네
사랑하고 싶지만 마음뿐인걸
나는 개똥벌레 어쩔 수 없네
손을 잡고 싶지만 모두 떠나가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가지 말아라
나를 위해 한번만 손을 잡아주렴
아아, 외로운 밤, 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 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 든다

울다 잠이 든다
울다 잠이 든다

         *          *          *

울다 잠이 든다.

그리고 잠이란 것은 일종의 도피.
또한 눈물이란 유약함의 표시.
그렇지 않다면
잠은 독을 가라앉히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이요,
눈물은 독을 배출하고, 정화된 마음으로 강인하게 설 수 있게 하는 힘일까.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나의 문제다.
나 자신만으로 벅차다. 어떤 상황에도 휘둘리고 싶지 않아.
이런 상태에서의 나는,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할 뿐이다.
현재 함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가족들까지도.

지금껏 잘 참아왔는데 왜 이제 와서.
혹은, 이제 더 이상 견디다 못해.

인내심의 한계인지, 불안함의 표출인지.
스스로의 바보스러움에 대한, 한탄인지.

하지만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돼.
주사위는 던져진 지 오래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았어.

개똥벌레가 아닌…… 반딧불이가 되어야지.
의지할 사람을 찾는 대신, 스스로 빛을 내어야지.

by 미르시내 | 2009/10/01 14:31 | 상념 | 트랙백
2009년 09월 30일
착한 아이 컴플렉스
 그래. 내가 병신 짓 하는 게 어디 하루이틀이냐. 제 앞가림 하나 못 하면서.
by 미르시내 | 2009/09/30 20:42 | 일상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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